빨간 딱지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생각

빨간 딱지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이보통입네다 2020. 10. 1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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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딱지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집에 빨간딱지가 붙는 순간 모든 이가 불행해진다는 전설."

세상사 살다보면 별 일이 많다는데 그 말이 맞다. 나도 살다가 우리 집에 딱지가 붙고, 난리법석 날 줄 몰랐다.

 

 

그 많던 우리 집 물건들은 다 SALE로 넘어갔을까?

 

우리 집 친가와 외가는 집안 풍경이 매우 달랐다. 둘 다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 빼고는 공통점이 없다. 친가는 원래부터 가난했지만 집안 장손인 큰 아버지가 서울에 직장을 잡아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 온 경우였다. 당시 큰 아버지는 우리 집 개천에서 용난 자식으로 말 그대로 듬직한 가장이었던 것. 반면에 외가는 시골에서 부유한 집안으로 처음에는 인천 부평으로 온 가족이 올라왔다. 서울에 가서 돈 벌고, 자식들 교육을 시키겠다는 외할아버지의 포부에 따라 인천 부평에서 서울 잠실로 이사 왔다. 

 

친가는 가난했고, 모두가 어렵게 살았다. 은행 직원이었던 큰 아버지는 돈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깔끔하고 철저했다. 반면 외가는 풍족했고, 가족 경영으로 사업을 하고 있어서 가족끼리 돈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가족은 하나다. 니 돈도 내 돈, 내 돈도 니 돈. 우리 집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된다. 서로가 서로의 명의를 빌려주고, 연대보증을 섰을 때부터. 

 

우리 아빠는 열심히 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결코 부자가 되지 못했다. 20대에는 조그만 당구장을 했다. 대학교 사회학과를 나와 사립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이 되고자 했으나 최종 면접에 가서 들었댄다. 학교에 후원금으로 3천만원 내야 한다는 사실을. 친가가 돈이 있나 뭐가 있나. 아빠도 더 공부하자니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않고, 그래서 사업을 시작했단다. 그러다 빠르게 바뀌는 시대에 발맞춰 당구장을 접고, 컴퓨터 학원을 차렸다. 빨리 업종을 바꾼 덕분에 아빠의 컴퓨터 학원은 동네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IMF가 터졌다. 당시 IMF는 사회 전반을 바꿔놓았다. 회사들이 줄줄이 부도가 나고, 집안의 가장이 일을 잃고, 이혼한 가정도 많았다. 결국 학원 다니던 애들도 나가고, 아빠도 학원을 접었다. 그 와중에 또다시 빠르게 바뀌는 시대를 직감한 삼촌이 휴대폰 대리점을 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개인당 하나씩 휴대폰을 가졌을 때가 아니었기에 삼촌은 휴대폰 사업 시발점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업에 아빠도 큰 이모부도 뛰어들었다. 

 

 

만약 아빠에게 안정적인 직업이 있었다면, IMF가 터지지 않고 계속 학원이 잘 되었다면 아빠는 일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생계를 위해 시작하였고, 소위 대박을 터트렸다. 휴대폰 구매율은 해가 다르게 급 상승했고, 큰 삼촌, 아빠, 큰 이모부 너나 할 것 없이 사업을 빠르게 확장했다. 각자 운영하는 대리점만 해도 여러 개. 거기다 아빠는 모은 돈으로 자잘한 사업을 함께 운영했다. 아빠의 성공적인 사업 덕분에 나의 10대는 부족함 없이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 집이 넘어가고, 아빠는 사업을 접었다. 삼촌, 아빠, 큰 이모부가 서로 섰던 연대 보증이 탈 난 것이다. 

 

하루는 혼자 집에 있는데 누군가 밖에서 벨을 울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찾아오면 조용히 있으라는 부모님 말씀대로 가만히 쥐죽은 듯이 있었다. 그런데 철컥철컥 소리가 나더니 사람 여러 명이 문을 따고 집안에 들어오는게 아닌가?! 당황한 나를 보고 사람들은 많이 겪어봤다는 듯이 뭘 하나 건네더니 부모님께 전해달라고 말하곤 집안 곳곳에 빨간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아- 이것이 드라마에서만 보던 압류 딱지구나. 나는 그 자리에서 놀라 얼어버렸고, 일하는 사람들은 빠르게 일처리를 하고 가버렸다. 

 

그 이후, 여러번 이사를 다녔다. 한창 힘들었던 몇 년의 시간을 글자로 다 적을 순 없지만 가족 모두가 힘들었다. 게다가 가족끼리 보증을 섰기 때문에(보통 가족끼리, 친구끼리) 끈끈했던 외가 식구들이 사건이 터진 후에 남남처럼 살게 되었다. 하지만 옛 어르신들이 남긴 명언이 있지 않은가. '시련은 제일 큰 스승이다.' 

 

* 깨달은 것

1. 보증서지 말자.

동생과 항상 하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 보증 서지 말자. 그리고 각자 잘 살자. 그래야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줄 수도 있는 거다. 우리 일은 각자 알아서 잘하자. 그게 효도고, 그게 서로를 도와주는 일이다.

 

2.  부모도 결국 사람이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보수적인 경상도 사람들이다. 가장, 집안의 어른, 부모에 대한 사회적 역할에 완벽히 충실하였고, 자식들에게 그렇게 보이려 노력했다. 자식에게 힘든 모습, 약한 모습,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고, 부모의 권위를 충실히 지켜왔다. 하지만 일이 터지고, 온 가족이 힘들어지자 부모님도 결국 약한 모습을 보였다. 초반에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안 그러던 아빠와 엄마가 나에게 와서 힘듦을 호소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시엔 둘 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볼 여유조차 없었다. 나에게 이해해달라, 나 힘들다, 어렵다, 짜증 난다, 속상하다를 외치는 부모의 모습은 내가 알던 나의 부모가 아니었다. 초반에는 얼마나 힘들까 싶어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했다. 하지만 힘든 시간이 길어지고, 부모는 돈으로 계속 싸우자 나 또한 마음이 어려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부모에게 짜증내고, 부모가 나에게 그만 힘들다고 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시간 지나 생각해보면 나의 부모는 오랜 기간 안정되고 든든한 부모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그 모습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것일 뿐.

 

3.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당장은 부족하더라도 내 몫은 하고 살자, 온전히 독립하자라는 목표로 회사를 다녔다. 한동안은 부모와 함께 가족 생계비를 보태며 지내다 몇 년 더 돈을 모아 독립했다. 

 

우리는 친가의 큰 아버지와 큰 고모의 도움이 없었다면 당장 길바닥에 나 앉았을 것이다. 그나마 친척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못했다면 우리 가족은 어떠했겠는가. 집이 망하고 빚더미에 올랐을 때는 개인적인 자본(가족)말고는 당장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런 일이 비단 우리 집 뿐이겠는가. IMF 때는 어떠했는가. 수많은 가장, 가족들이 흩어지고 깨지며,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던가. 그 비극의 책임은 철저히 개인에게 주어졌으며 온전히 알아서들 살아내야 했다. 돈은 현실이고, 돈 앞에서는 가족도 없고, 나도 없는 끔찍한 삶을 사람들은 사는 것이다.

 

그 말 많은 연대보증 제도가 2019년에 폐지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1차, 2차 금융권에 이어 대부업체까지. 하지만 아직 개인 간의 연대보증은 지속된다 하니 뭐 절반의 폐지 정도라 생각된다. 연대보증 말만 들어도 이제는 치가 떨린다.

 

"빨간딱지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집에 빨간딱지가 붙는 순간 가족도 남이 된다는 불행한 전설."

 

오늘은 여기까지-

 

2019.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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