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생각

그가 떠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이보통입네다 2020. 10. 1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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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 참 더럽게도 나이 따진다 욕하고 다녔는데 서른이 넘어서는 나부터 내 나이를 따지기 시작했다. "조신하게 나잇값 해야지."

누구는 서른이 터닝포인트, 인생을 바꾸는 신의 한 수라 고도 하지만 나는 글쎄, 그렇지 않다. 다만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문제점과 잘한 점을 꼽아보는 정도. 꼽다 보니 지금 생각하는 것들이 대한민국 여자들이라면 다들 겪어본 현재 겪고 있는 것들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 빼어난 외모도 뭐 하나 잘난 능력도 없는 '이보통'으로 조용히 사는 여성으로서 썰을 하나하나 수다 떨듯이 풀어보고자 한다. 

 

 

뭐니 뭐니 해도 연애가 먼저 생각난다. 좋은 놈, 웃긴 놈, 나쁜 놈(개 xx) 등등. 오, 생각해보니 그리 게으르게 살지는 않았다. 그동안의 연애를 쭉 되짚어보니 좋기도 했지만 참 내 모습이 어리석기도 했구나 싶다. 20살 되자마자 사회생활 경험한다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하고, 학자금 대출 갚으며 다녔다. 하지만 내가 들어간 학교는 부모님이 만족하지 못하는 대학교였고, 그 결과, 4년 내내 나에게 대학교를 제대로 가지 못했다는 말과 남들과의 비교가 뒤따랐다. 그때부터 자존감은 머리카락이 수쳇구멍에 막히듯이 꽉 쑤셔 버렸다. 사실 이런 것들은 내가 온전히 나로서 힘이 있고 자존감이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소위 명문대에 입학하는 학생 비율이 소수인데 그럼 나머지 학생들은 다 나 같게?! 하지만 부모님에게 착하고 예의 바른 맏딸이 되고자 약 18년 동안 노력했는데 대학 입시에서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드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견딜 수 없었다. 

 

낮은 자존감이 여기서 끝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자존감이란 놈은 내 정신과 몸까지 지배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녀석인지라 이는 곧 내 연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학교 때는 나름 치명적이고 푹 빠진 사랑을 했었다. 그것도 복학생과. 이때의 문제는 모든지 상대방에게 맞추며 시시때때로 현모양처 노릇을 했다는 점이다. 분명 아닌 모습이 있어도 맞지 않아도 억지로 그 안에 맞추려 노력했다. 이 모든 것이 자존감 낮은 나의 모습임을, 상대방만 바뀌었지 결국 내 부모에게 잘하고 맞추려 하는 모습과 똑같았음을 깨닫는 데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모든 관계에서 나는 솜사탕 마냥 금방 사라져서 상대방이 떠나면 그 뒤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상태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말했었다.

"인생을 돌아보면 사실 기억나는 일도, 잊을 수 없는 인연도 그리 많지 않다. 참 즐거웠던 날은 그리 많지 않고, 정말 두려워해야 했던 일 역시 얼마 되지 않는다. 사실, 당신은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가다 보면 또 어느새 지나온 길을 돌아볼 날을 맞을 것이다."

 

누군가의 입김에 이리저리 쫓기지 않고, 자신만의 기둥이 있는 사람. 무엇이 더 낫고 아니 고를 평가할 수 없는 자신만의 기둥이 필요하다. 나는 자신만의 기둥 따윈 없었다. 자식으로서 여자친구로서 일하는 사원으로서 역할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만 집중했다. 그게 곧 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가 떠나면 안 되는 줄 알았어야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없어지면 안 되는 줄 알았어야 했다. 상대방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아니라 나에 대한 고민과 걱정을 먼저 했어야 했다. 그걸 29살 되던 해, 느지막이 누워서 생각하다가 혼잣말이 나왔다. "이러니 네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게야." 그 날부터 하나씩 하나씩 조금씩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필요한 부분은 행동하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도 그 누군가의 무엇으로 행동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나도 지금 완벽히 벗어났다고 말 못 한다. 월급 받으면 상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가족 사이에서도 내 생각대로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이 환경과 일상생활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가? 88만 원 세대에 청년실업률이 최고치를 찍은 지금.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이딴 공자왈 맹자왈 짓거리를 누가 하고 있겠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내가 있어야 공부도 하고, 일도 하는 거 아닌가. 무엇을 하든지 그 첫 번째에는 나에 대한 고민과 충분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 사실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이를 가진 엄마가 돼서도 불변의 법칙이다.

 

대한민국에 착한 딸/아들, 착한 여자친구/남자친구, 착한 사원들이여. 너는 누구니. 응?

 

219.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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