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척, 척, 척. - 자꾸 그런 척하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어 -

생각

그놈의 척, 척, 척. - 자꾸 그런 척하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어 -

이보통입네다 2020. 10. 16.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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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블로그를 정리하던 중, 20대 후반에 썼던 글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니 완전 민망- 뻘쭘- 웃김- 그래도 그때는 지금보다 더 머리가 잘 돌아갔고, 재기 발랄했다. 이 글은 당시 내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주는지라 이 곳에 옮긴다.

 


 

20대 후반 가을 어느날.

 

예쁜 척, 착한 척, 귀여운 척, 여린 척, 아는 척, 모르는 척, 아는 척, 쿨한 척, 사과하는 척, 불쌍한 척.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막장드라마를 찍었던 이전 연애와 바람같이 찾아왔다 바람같이 사라진 썸 이후에 솔로가 된 지 어언 10달. 

나이가 어느 정도 차서 그런지 소개팅 제안이 많이 들어온다. "지금도 빠른 편은 아니지, 좀만 더 지나 봐. 소개팅 제안도 안 들어올 거야. 너 나이를 생각해, 애는 언제 낳으려고 아직도 이러고 있어" 등. 우리 집 김여사 님보다 더 찬란한 직구가 날아오는 요즘. 여러모로 척하느라 피곤하다.

 

초반에는 캔디처럼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가 이게 먹히지 않자 바쁜 척도 해보고 모르는 척도 해봤지만 그래 봤자 지금의 나는 결혼 적령기에 내 짝 못 찾고 방황하는 기러기 꼴로 보이나 보다. 뭐 그리 다른 사람 인생에 관심들이 많은 건지, 그 댁은 정말 너무 평안하셔서 제삼자인 내가 걱정거리가 된 건지, 아니면 정령 나의 안녕과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힘써주시는 건지 모르겠다.

 

당시 글은 제발 나를 좀 가만히 혼자 내버려두라고 꽥꽥되고 있었네-

 

영원히 혼자로 살 용기도 없다. 그런 것도 자신감과 확신이 있어야지 나같이 약해 빠진 애는 어렵다. 다만 지난번 경험으로 인해 처절히 깨달은 점이 있기 때문에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다. 바로 내 상태가 메롱일 때 사람을 쉽게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 물론 거지 깽깽이 같았던 상대방 문제가 크지만 그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내가 나로서 온전히 서있지 못한 상태에서 낯선 사람이 다가왔을 때, 덜컥 손을 잡아버리면 되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진다는 것. 그러다 막장드라마 찍는 거다. 이런 걸 초중고 교과서에 미리 좀 가르쳐주면 안 되나? 학교 때 배운 미적분이 당최 내 인생에서 언제 쓰인단 말인가!

 

내가 좋아하는 스얼작가(중국에서는 스얼 언니라고 부른단다)가 쓴 '사랑한다면 내려놓아라' 책에 이런 글귀가 있다. 

 

'시간은 여자에게 최대의 적이자 최고의 시금석이기도 하다.

시간을 통해 우리는 진, 선, 미를 구분해낼 수 있다. 

또한 영원 사실, 충분히 신뢰할 만한 사람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결국 우리 모두는 서로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에게, 그리고 그가 당신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촉하지 않는 사랑을 하자.

서로 손을 맞잡고 더 멀리 동행할 그 사람을 찾아보자.'

 

 

쫓기듯 만나고 싶지 않다. 내 나이 곧 서른이니까, 점점 주름이 늘어나니까. 등의 이유로 적당해 보이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는 그전에 경험한 상처가 아직 소화되지 않았고, 나 스스로 서야 할 힘이 부족하다 느끼기 때문이다. 번쩍번쩍 대단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게 아니라 스얼언니 말대로 서로 손을 맞잡고 더 멀리 동행할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 내가 원석이 되어가는 이 시간과 과정을 조용히 보내고 싶다.

 

차마 소개팅을 제안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말하기에 쑥스럽기도 하고 혼자 진지 해지는 것 같아 오늘도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모르는척하면서 넘어가고 있다. 자꾸 이렇게 척하다가 성질 골로 갈 것 같지만-

여러분! 소개팅을 요청하는 솔로들에게만 자리를 마련해줍시다. 가만히 있는 솔로 걱정 마세요. 다 지들 인생 알아서 잘 살고 있다니깐요!

 

2019.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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