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본 할머니

생각

꿈에서 본 할머니

이보통입네다 2020. 10. 17.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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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마트 같은 곳이었다. 카페면서 마트이기도 한 아주 큰 장소.

내 노트북도, 휴대폰도 있고, 할머니의 근황을 카톡에서 볼 수 있었다.

할머니 카톡 사진에는 아프리카 원주민과 같은 이국적인 외국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머리를 올리기도 했고, 브라탑을 입기도 했다. 

놀러를 간 건지 아님 거기서 사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즐거워 보였다.

마트에서 카톡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결제를 하러 간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동한 그곳에서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를 알아보았지만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할머니는 할머니가 봐야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고, 나도 내 일이 다시 생각나 노트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카톡 영어로 할머니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던 참이었다.

할머니가 해외에서 잘 지내고 있구나 싶어서.

근데 마트 직원이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말했다.

다들 급속도로 마트를 빠져나가길래 나도 나가려다

내 노트북을 가져갈까 내버려 두고 갈까 고민하던 차에 깨달았다.

아 이건 꿈이구나. 그러고 깼다.

 

고생 많았던 지난날을 보여주던 할머니의 손

 

눈물이 났다. 

꿈에서 할머니를 봤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더불어

난 꿈에서조차 내 할 일을 다 하고 할머니에게 연락할 생각을 했구나 하는 후회.

살아 계실 때도 정착 내 일을 먼저 하느라 아픈 할머니는 항상 나중이었는데.

심지어 할머니와 함께 하는 잠깐의 시간도 아프실 때는 즐겁지 않았다.

온 가족이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계속 집안사람들이 모르는 이들이라며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밤새 끙끙대며 말을 하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소중하고 감사하다고 여기던 할머니에게 짜증이 났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일이 뭐라고 할머니보다 더 중요했을까.

난 정말 할머니가 영원이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우리 모두는 결국 나 자신이 우선이다.

내가 먼저이고, 내 안위가 제일이다.

가족도 가족을 아낀다는 것도 사실은 지어낸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부성애, 모성애에나 있을지도.

이 또한 100% 모든 이들이 가졌다고 할 수 없으니 어쩌면 가정된 혹은 강요된 개념일지도.

결국 자식된 자든, 손주된 자든 자기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면 된다.

어차피 우리는 자기 삶이 먼저이기에

그 삶을 시작해준, 그 삶을 인도해준 내 조부모와 부모의 노력을

내가 제대로 살아감으로써 갚으면 된다.

이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졌다.

 

꿈에서 자유롭고 즐거워하는 할머니를 보니

할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내 삶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함께 솟아난다.

할머니는 그 말을 해주러 온 꿈에 나타난 걸까.

내가 공부하는데 침체기인걸 아시고.

현재 아침 6시 44분.

공원 갔다가 와서 공부해야겠다.

 

2019. 0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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